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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by inhyuk9501 2022.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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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사다만 보이드는 법원 앞에 둘러진 폴리스라인을 뚫고 나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지금 중대 형사 재판이 열리는 곳으로 악명 높은 올드 베일리앞에 서 있다. 건물 꼭대기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정의의 여신상은 원래 정의를 추구하는 강인함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함을 상징할 의도로 만들어졌겠지만, 사만다는 거기서 그 허상을 엿보았다. 정의의 여신상은 도리어 사법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지붕 꼭대기에서 건물 아래로 몸을 던지려는 여자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했다. 오늘도 법원 앞에 벌떼처럼 몰려든 기자들 덕분에 인근 도로와 지하철역은 마비되었다. 사만다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재판 시간에 늦어 지하철역에서부터 부랴부랴 뛰어오느라 땀이 비 오듯이 흘렀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올려 묶은 금발 머리도 그새 흐트러졌다. 언론은 이번 재판과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공판 46일째로 접어든 지금, 사만다는 전 세계 주요 신문에 얼굴이 팔리고 말았다. 집요한 기자 하나가 켄싱턴에 있는 사만다의 집까지 쫓아와 버티는 바람에 경찰을 부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만다는 오늘 또 괜히 주목을 받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인채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8시간만 더 버티면 배심원 생활을 끝내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사만다는 마침내 법정으로 들어섰고, 법원 서기가 배심원단을 불러 모았다. 다른 배심원들의 지목으로 배심장이 된 중년남성 스탠리가 천천히 일어나 앞장섰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법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올드 베일리의 1번 법정은 중대 형사 재판이 아니면 웬만해서 열리지 않았다. 크리폰(아내를 죽인 죄로 처형된 미국인), 클리프(5년 동안 13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법), 데니스 닐슨(최소 12명의 청년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같은 살인마도 이곳 1번 법정 중앙에 있는 피고인석에서 자신의 중죄에 대해 답변했다. 천장의 커다란 반투명 유리로 쏟아지는 조명이 항상 피고인석의 녹색의자를 근엄하게 비추고 있다. 방청석은 졸린 눈의 방청객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다시없을 세기의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노숙까지 하는 열정을 불살랐다. 얼마 전 피고인을 체포해서 현재 논란의 중심에 있는 수사관도 방청석에 있었다. 월리엄 올리버 레이튼 폭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이름 머리글자를 따서 일명 '울프WOLF'라고 불렀다. 울프는 마흔여섯 차례 열린 재판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그는 체격이 좋았고, 세파에 찌든 얼굴이지만 영롱한 푸른색 눈동자 만큼은 항상 반짝거렸다. 사만다가 매력을 느낄 법한 남자였다. 몇 달째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 같은 얼굴과 세상의 짐을 혼자 다 짊어진 듯한 표정만 아니라면,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언론에서 '방화 살인법'이라 부르는 오늘의 피고인은 런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연쇄 살인법에 등극했다. 그는 27살 동안 열너댓 살 먹은 매춘부 스물일곱명을 죽였다. 피해자 대부분이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산 채로 불에 타 죽었고, 증거는 전부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러다 살인 행렬이 갑자기 뚝 끊겼지만, 경찰은 유력 용의자 조차 특정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죄 없는 소녀들이 죽어 가는데도 아무런 예방 조치조차 취하지 못한 런던 경시청은 혹독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 소녀가 죽은지 18일째 되던 날, 범인은 울프의 손에 잡히고 만 것이다. 지금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그 남자의 이름은 나기브 칼리드, 파키스탄계 영국인으로 런던에 혼자 살며 택시를 운전하는 수니파 무슬림으로, 가벼운 방화 전과가 있었다. 피해자 중 세명이 그의 택시에 탑승했었다는 DNA 증거와 울프의 결정적인 증언이 법정에 제출되었을 때만 해도 유죄 입증은 너무 쉬워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것이 무너졌다. 수사팀의 보고서와 어긋나는 알리바이가 나타났고, 칼리드가 구속 수사를 받는 도중에 폭행과 협박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게다가 법의학 증거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다 보니 불에 탄 DNA 증거는 신빙성이 없다는 의견이 우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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