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았다. 유키에가 필 케이스 안의 약을 바꿔치기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러나 비어 있는 필 케이스에 약을 몰래 넣은 사람이 그녀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유키에가 사람을 죽이는 따위의 끔찍한 짓을 저리를 것 같지는 않았다. 다카유키가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날 유키에 씨가 도모미를 만난 것은 사실인 듯한데,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다카유키의 머리를 스쳤다. 그것은 도모미가 죽은 이후로 그가 계속 믿어 왔던 사실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었다. 물론 이번 사건의 의미도 전혀 달라진다. '진정해.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해 보자.' 스스로 자신을 다독이면서 다카유키는 기억을 차례대로 더듬었다. 그러자 불길한 상상이 점점 현실감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키에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이 좀 더 명확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겨드랑이에서 땀이 흘렀다. 오늘 밤은 전에 없이 날씨가 시원하다. 땀이 날 만한 기온이 아니었다.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다카유키는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불길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끙끙거리며 밤을 지새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톡, 하고 작은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다카유키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바람이 휭 불어왔다. 방향으로 보아 베란다 쪽인 듯했다. 다구가 베란다 문을 열었나? 하지만 그가 움직였다면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기 때문이다. 그 순간 우지끈, 바닥이 울렸다. 다카유키는 몸을 바짝 웅크렸다. 사람의 숨소리가 들렸다. 누가 옆에 있다. 그런데 다구는 아니다. 다구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바닥을 비비는 듯한 소리가 났다. 누군가 기어서 다가오고 있다. 누구야. 하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으윽......." 다카유키는 신음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신음 소리가 목구멍에서 비명으로 바뀌었지만 거기서 더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조용히 해."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카유키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부히코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 있는 것인가. "험한 꼴을 당했군. 기다리게, 금세 풀어 줄 테니." 눈가리개가 없어진 뒤에야 실내가 캄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다. "모리사키 씨...... 무사했군요." 노부히코가 재갈을 빼 주자 다카유키가 소곤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간신히 살았네, 이래 봬도 옛날에 다이빙 선수였거든. 더 높은 곳에서 다이빙을 한 적도 있지. 지금처럼 배가 나오지 않았던 시절의 얘기지만." 노부히코는 다카유키의 손발도 풀어 주었다. "죽기로 작정했는데 말이야. 세상사 참 어이없지?" "왜 여기로 돌아오신 겁니까?" "처음에는 돌아올 마음이 없었네. 죽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멀리 가 버릴까도 생각했지. 과거의 나 자신을 버리고 소일거리나 하면서 살자고 말이야. 전에 그런 생활을 동경한적이 있거든." 대기업 사장이 꿈꿀 만한 얘기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내가 얼토당토않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나 싶은 거야." "실수란..... 유키에 씨를 죽인 것 말씀인가요?" "그래. 그렇다고 복수한 걸 후회한다는 얘기는 아닐세. 그건 누가 뭐라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어. 다만 복수할 상대가 정말 그녀였는지 의문스럽더군." "무슨 말씀입니까?" "처음부터 설명을 해야 이해가 가겠지." 몸 여기저기가 아픈지 노부히코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을 이었다. "사건의 진상은 대개 시모조 양이 얘기한 그대로야. 참 대단하지? 다들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데 혼자서만 냉정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으니 말일세, 그녀를 비서로 발탁한 사람이 바로 나인데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더군. 머리가 정말 잘 돌아가는 여자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이야. "그녀는 모리사키 씨가 처음부터 복수할 목적으로 이번 여행을 계획했다고 했는데요." "그래, 맞는 말이야." 노부히코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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